<주몽>의 현토군 태수 양정, 윤동환을 강사로서 만나다
지난 학기, 믿었던 종교와 문화 수업의 기말고사에서 놀라운 문제(2008/06/14 - [산다는 것은] - 너무나 대조되었던 두 과목 시험문제)를 만난 후 눈물을 머금고 취업에 매진해야 할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재수강을 신청했다. 사실 굳이 재수강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쩐지 오기가 생겨서 넣었다. 이동진 선생(2008/03/15 - [산다는 것은] - 재미있는 이야기)을 다시 만나 그 문제들을 '제대로' 풀어주리라는 각오였다. 그러나 이동진 선생은 이번 학기에 강의가 없었고 나는 생소한 이름의 한 남자 강사를 만났다.
자연대가 있는 28동 101호는 굉장히 구린 건물이다. 청소는 언제 했는지 가늠할 수 조차 없는 복도와 곳곳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들, 게시판에는 그 흔한 "이명박 정부 이대로 괜찮은가?" 따위의 대자보도 붙어있지 않았다. 어차피 졸업할 예정인데 학교에서 건물을 어떻게 관리하든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난 사범대생이지 않은가.
"야, 아무래도 수업 들어온 강사가 배우 같아. 배우."
"배우? 무슨 소리?"
"윤동환이라고 알아? 배우같은데?"
고시생이 알 리 없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분명히 배우인데...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4시가 약간 지나자 조교와 함께 기기를 조작하던 강사가 기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시간을 지연시켜서 미안하단다. 그리고 수업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종교와 문화' 수업을 맡은 윤동환입니다. 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86학번이고요,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아마 서울대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느라 못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전 배우입니다. <주몽>에서..."
...!
머릿속에서 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런 돌탱이.
그렇다. 그는 "금와아아아" 나 "주몽이 네 이노오옴" 등의 그야말로 만화영화의 악당들이 마지막에 날리는 "두고보자!" 삘의 주옥같은 대사를 <주몽>에서 매회 최소 2회 이상씩 날려주던, 바로 그 현토군 태수 양정이었던 것이다. 아니, 함부로 '그'라고 지칭하면 안되겠다. 종교와 문화 과목을 맡은 강사가 윤동환 씨였다.
금와와 주몽을 찢어죽일 듯한 기세로 외치던 그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게 강단에 선 윤동환 강사는 매너 넘치고 목소리가 일품인 멋진 선생님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국대 연극영화과에서 석사를 받고 지금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라고 소개했다. 프랑스에서 영화이론 공부를 2년간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매우 겸손한 태도로 말이다.
세상에 친구녀석과 두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해모수우~!"를 외쳤던 내가 그를 몰라보다니 나름 <주몽>팬의 입장에서 너무 부끄러웠다. 이래뵈도 1회부터 호주가기 직전 방영분까지 단 한편도 빼놓지 않고 봤던 <주몽>빠였다.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의 나긋나긋(?)하면서도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많은 여성 학생들이 멍청히 수업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팬'의 입장에서 수업을 들었다. 종교와 문화라는 강의 제목답게 앞으로 진행될 수업에서 쓸 철학적 베이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주로 이원론, 변증법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기본적인 철학지식은 어느정도 갖고 있기에 4학년씩이나 되는 입장에서 그다지 들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두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하나. 촛불집회에 대하여 묻다
그는 수업 내내 대통령을 거론할 때마다 간단히 '이명박'이라고 했다. 대통령이라는 호칭도, 그렇다고 '땅박이' 등의 비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이명박이었다. 그러면서 나왔던 이야기가 촛불집회에 대한 것이었다. 진리를 아는 방법, 어떻게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까를 설명하면서 촛불집회에 참가하지도 않은 채 그것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은 매스컴에 비추어진(그의 표현에 의하면 2%정도의 신뢰도밖에 가지지 않은) 모습만 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촛불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도 전체의 그림은 물론 보지 못한 채 자기가 서있는 위치에서 본 것만으로 판단하기 십상이다, 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인식론의 측면에서 일견 타당한 비유다. 그러나 그가 굳이 촛불집회의 예를 든 이유는 역시 본인이 참가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멋지게 웃으면서 촛불집회에 나가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슬쩍 파악해 본 후 스스로 몇 번 나갔다고 밝혔다. 물론 출석 0%, 과제0%, 시험 0%, 태도 0%, 기타 100%의 놀라운(!) 성적 평가방법을 강의 계획서에 써놓은 사람답게 이런 것으로 학점상 이익, 혹은 불이익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둘. <해변의 여인>을 보여주다
매주 강의마다 우리는 영화를 볼 예정이다. 물론 전체를 다 보는 것이 아니라 그날 주제와 관련된 부분을 영화 클립 형태로 잠깐씩 본다. 오늘은 인간의 인식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해변의 여인>에 나온 김승우와 고현정의 대화를 보았다. 김승우 자신이 고현정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는가에 대한 노트 필기(?) 부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본 것은 윤동환 강사 본인이 직접 나온 부분이었다. 매우 짧았고 대사는 하나 정도 였던 것 같다. 우리에게 그 장면을 장난스레 보여주었는데 하필 오디오가 맛이 간 상황이라 본인이 직접 대사를 해주었다. 물론 고현정 부분도 말이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배우를 직접 보는 것, 그리고 그가 강단의 강사로 선 것 말이다. 우리 학교에서 강의를 하기 전에 동국대, 서울 예대에서 이미 강단에 섰다고 한다. 아직 수업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으니 그가 어떤 선생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요즘 하는 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도 작은 배역을 하나 맡았다고, 혹시 어제 했는데 본 사람 있냐는 농담도 슬쩍 날리는 그를 보면서 내 마지막 학기가 졸업을 위해 모든 것을 올인해야 하는 그런 우울한 것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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